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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자이자 음악평론가인 예총 강문칠 제주연합회장. |
예술계에는 이보다 더 먼저 한파가 있었다. 아니 예술계에 봄이 언제 왔었던가? 제주 사회는 경제! 경제! 를 부르짖으면서 도민들을 경제 전문가로, 아니 경제 이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기회나 여유를 주지 않는 것 같다. 예술은 이러한 틈바구니 속에서 연한 노오란 새싹을 세상에 빼곰히 속을 드러내지만 경제라는 인간의 욕심과 절대적인 명제 앞에서 그저 시들어 버리기가 십상이다.
꽃을 보기도 전에 사그라지는 꿈의 세계인 예술들, 어쩌면 작품만이 아니라 창작 욕구와 삶의 의욕과 열정들도 경제라는 너무나도 큰 벽 앞에 산산히 무너지는 장면들을 우리는 직시하면서도, 경제 제일주의는 오늘도 제주화두의 맨 선두에 자랑스럽게 서 있다. 마치 경제 이외에는 다른 해결 방안이 하나도 없다는 듯이 거대한 몸짓으로 도시를, 농촌과 해안 마을 곳곳을 휩쓸고 다니고 있다.
필자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닐 적에 미래에 대한 꿈을 그렸었다. 당시 스물 한 살이었다. 그 후 25년 뒤에는 무엇 무엇이 되어 있어야 한다.
첫째가 당시에는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어 있어야 한다. 두 번째로 작곡가가 되어 있어야 한다. 셋째, 지휘자가 되어야 한다. 넷째, 시인이 되고 싶었다. 다섯째는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꿈은 정말이지 夢想이었다. 당시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직장을 다녀야 할 형편이었기에 다만 젊은 이상과 혈기가 왕성한 나로서는 마음 깊숙이 오직 꿈에 의탁하고 즐기면서 살아가는 것을 생활처럼 하고 있을 때이다. 위의 희망을 실현하기에는 어느 하나도 근접할 수 있는 길이 안 보였다.
자신의 열정과 희망만으로는 참으로 역부족임을 여러 차례 체험하면서도 어떻게든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다음해에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고(등록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음) 대학생이 된 나는 그야말로 물을 만난 고기이다. 거치른 바다이지만 맘껏 헤엄쳐 어디든 가고 싶은 곳을 다닐 수 있을 것 같은 자유와 희망이 가득한 시절이었다.
기숙사와 하숙, 절간에서, 자취를 전전하면서도 꿈을 펼치기에는 아직도 45세가 되기까지 많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꿈을 계속 그려가고 있었다. 당시(1970년대)는 정치적 상황과 대학의 갈등은 젊은 이상과 청춘을 책상에만 머물게 하지 않았다. 때로는 분노와 절망, 사랑과 진리, 현실과 이상 사이에 매일 매일이 안개 가득한 山寺의 분위기였다.
젊음은 방황이라고 했다. 정신적, 육체적, 사회적, 인간관계 모두가 방황을 요구하고 진실을 은폐(隱蔽)한 대화만을 하고 있었다. 젊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의 사회 분위기가 그랬다. 군대에서 34개월 동안 복무를 마치고 복학하여 군에서 선배들에게서 배운 바를 실천하는 제법 어른스럽게 대학을 다니면서 꿈의 실현을 위해 도전하기 시작했다. 4년 후면 사회에 진출할 것이고 이 사회가 간단하지 않아 제대로 무장하여 진출해야만 살아남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정신 무장이 제대로 되어야만 했다. 심리학에 몰두 했다. 음악을 전공하고 있으면서 음악심리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당시에는(현재도 그렇지만) 전혀 생소한 학문이었다. 그러던 중에 독어독문학과에 실러(독일 시인)강좌가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막무가내로 청강을 하면서 독일의 시인 괴테와 쉴러, 뮬러 등을 접촉하게 되었다.
후에 그들은 유명한 베토벤, 슈벨트 같은 음악가들이 즐겨 이용한 합창 교향곡과 가곡들의 가사를 썼던 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경제학과에서 1학년 과정에서 다루는 경제학이나 철학과에서 실존주의 철학가들(하이덱거, 야스퍼스 등), 역사학과에서는 세계사와 문명사, 미술학과에서 다루는 예술미학, 사회학과에서는 지역사회와 교육, 국어국문과에서는 경상도의 민요와 민속을, 그러면서도 대학시절 내내 철학과에서 청강을 한 경험은 오늘도 참으로 소중한 양식으로, 교양으로 내 자신을 존재하게 해준 지식이며 양식이다.
아르바이트도 참으로 많이 했다. 음대생이라 당시 하숙집 자녀를 공부를 지도할 만큼의 영, 수, 국 등의 수준이 못되어 밖으로 나가야 했다. 마침 한국 굴지의 모직 공장인 대한방직에서 합창단 지휘자를 구한다고 해서 아는 사람을 통해 연락이 왔다. 몇 달 동안을 지휘를 했는데 학생 신분에는 지나칠 만큼 큰 액수를 받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대학 내에 학생 현상 논문 모집이 있었는데 나는 해마다 음대에서 뽑혀 논문을 발표하고 시상금도 받곤 했다. 논문을 준비하면서 지도 교수로부터 많은 학문하는 방법과 음악예술가로 살아가야 하는 마음가짐에 대하여 지도를 받게 되었다. 어릴 적부터 글쓰기를 좋아해서 교내 신문에 시와 수필을 기고하고 원고료를 받는 일이 마냥 즐거웠다. 4학년 때에는 편집장이 되었다. 작곡과 학생이 편집장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아마 신문에 종종 기고하는 것을 참작한 것일 게다. 그 일을 1년간 수행하면서 숱한 좌절을 맛 보았다. 학생 운동이 전국으로 번지는 시대였다. 중앙정보부와 경찰에서는 편집장실을 마음대로 들락거렸고 내 책상 설합이나 케비넷은 언제나 열려 있고 원고들은 사라지기 일수였다. 사회의 부당함을 내 한 몸으로 해결할 수 없음이 안타깝고 그렇다고 편집장이 주저할 수 만도 없는 딜렘마 였다. 곰곰이 생각을 한다.
이제 2, 3개월 후면 대학도 졸업이다. 나는 여기가 아니라 사회이다. 사회에는 내가 해야 할 일이, 나를 필요로 하는 사회가 기다리고 있다. 꿈과 희망은 여기가 아니다. 저 멀리 아득하고 희미하지만 나에게 다가오는 서광의 한줄기 빛이 인도하는 길을 선택해야만 한다. 내가 활동할 시기인 대학에의 일들은 이제 후배들에게 물려 주어야 한다. 이루지 못한 일들을 사회에서 이루자----이런저런 생각들이 얼마나 나를 얼마나 짓 눌렀는지---
지금 생각하면 긴 어둠의 동굴, 긴 터널을 어떻게 지나 왔는지, 빠져 나왔는지 용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어려운 시절 꿈과 희망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무엇이 되었을까 하고 생각하면 까마득하다. 45세가 되어 아내에게 이러한 나의 꿈과 희망을 말했을 때 눈물을 보였던 45세. 이제 그 나이도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갔다. 경제적 부유만 해결하지 못한 채 다른 꿈들은 그런대로 이루어진 셈이다.
돈은 필요한 것이지만 지나치지 않게, 속세 말로 삼세끼 먹을 정도만 되면 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 나의 다른 꿈들과 돈은 이상하게도 상극(相剋)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지나친 돈의 노예는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해치고 나의 꿈 마저 다 빼앗아 가는, 희망을 착취하는 생각을 했다.
사회가 지나친 경제 제1주의가 혹시 우리들의 삶을 혼탁하게 하고, 국제자유도시를 지향하는 제주도민들에게 오히려 경쟁심을 부풀리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정신적 여유, 한가로운 시간들, 주변을 살피는 마음들, 아픈 것에 대한 관심들---경제 보다 더욱 소중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러한 모든 곳들을 아우르는 제주가 되기를 진심으로, 진심으로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