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이야기

  • 등록 2009.01.30 11: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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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을 하루 앞둔 시간, 혼자서 연구실에 우두커니 앉아 눈이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오래 전 고향에서의 겨울이 생각이 난다.
대학 졸업을 앞둔 겨울, 대구에서의 오랜 시간을 보내고 고향에서 후진을 양성한다는 생각으로 중등교사로의 길을 선택하고 순위 고사를 보고 합격 여부와 발령을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의 일이다.

고향 성읍리(표선면)에는 눈이 곧잘 내렸다.
한번 내리는 눈은 잘 녹지 않아 길은 빙판이 되는 일이 십상이었다. 산골이라 차도 하루에 한두 번 다닐 뿐 정적이 하루 종일 흐르는 그런 산골이었다.
3개월은 족히 산골에 묻혀 살면서 한편 지루하기도 하지만, 고요한 그곳 생활을 즐기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해서 매일을 수필이나 시를 일기를 쓰면서, 철학 서적을 읽으면서, 때로는 버스에 올라 성산 일출봉(과거에는 그곳에 리라 호텔 커피 숍이 있었음)으로 발길을 옮겨 동쪽에서 바라 보는 한라산과 제주의 긴 장면을 즐기곤 했다.

눈이 쌓인 오조리 양어장과 백사장, 검은 색깔을 한 시퍼런 출렁이는 바다, 동쪽으로는 우도가 보이고 마음을 정리한다고 길을 나선 나는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면 오히려 마음은 더욱 지쳐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하던 시절, 음악을 들을 수 없어 겨우 이곳저곳에서 돈을 마련해서 전축을 하나 구입하여 음악을 들을 수 있을 때 부터는 집 밖을 나가는 횟수가 극히 드물게 되었다.

오늘 처럼 눈이 많이 내리던 날, 겨울 방학을 맞아 고향에 머물고 있는 대학생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음악 감상회를 준비 하였다.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과 모차르트의 교향곡, 실내악, 슈만과 브람스의 실내악곡, 서곡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중에서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곡은 롯씨니의 윌리암 텔 서곡이다.
고요한 새벽을 알리는 첼로의 아름답고 정적의 솔로, 마치 내 자신의 처지를 위로하듯 느린 현악의 화음들 위에 천천히 미끌어지 듯 선율이 흐른다.

새벽에서 동이 트는 평화와 행복이 가득한 알프스, 마치 내 고향의 분위기를 그린 듯한 서곡은 플륫과 일글리쉬 호른의 2중주에서 나의 미래를 암시라도 하듯이 북바쳐 오르는 열정을 불사르는 감정을 지체할 수 없듯이 상승하면서, 마음 깊숙히서 음악의 흐름 속에 현실을 직시한다.
트럼펫의 강한 신호를 시작으로 행진곡과도 같은 힘찬 팡파르는 그동안의 나의 지친 마음을 달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정열과 희망의 오랜 참음들이 한꺼번에 달성이 되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신세계의 음악, 사방이 흰눈으로 둘러 쌓인 고향 마을, 그러나 그 속에서 나는 긴 겨울을 이렇게 행복한 꿈을 그리며 지나고 있었다.
그 날 이후 후배들은 윌리암 텔 서곡 중에서 신나는 트럼펫 팡파르 부분을 노래하면서 행진을 한다.

깔깔깔 웃으면서 힘차게 걸어가는 발걸음에 맞추어 걸어가는 그들의 미래에 마치 원하는 바의 소망들이 모두 이루어질 것 같은 기대가 있는 오래 전의 일들은 오늘처럼 온 사방이 눈으로 둘러 쌓인 겨울에야 기억나는, 그래서 펑펑 내리는 함박눈은 한 편의 아름다운 시구(詩句)처럼 내 마음에 하나 하나씩 쌓이는 추억의 겨울의 이야기이다.

그때의 그 후배들은 어디에선가 열심히들 살아가고 있겠지, 자신의 일들을 위해서 노력하며 살아가는 후배들, 그러한 추억과 살아가면서 체험한 아름답고 소박한 마음들이 오늘도 그리워지는 시간이다.

내 자신도 나름으로는 열심히 맡은 바의 직책과 일들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간혹 이러한 오래 전의 일들을 들추어낼 때 마다 순수함에서 너무 멀리 와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겨울에 만나는 무수한 일들과 사람들과의 인연들이 겨울, 봄, 여름, 가을---온 인생을 통해 만나는 관계들에서 더욱 순수함을 요구하는 시간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오랜만에 기억 속에 묻힌 겨울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어 본다.
강문칠 기자 mck@ctc.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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