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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약산 김원봉과 역사의 기생충들

일제강점기엔 일본에 빌붙고, 해방후도

영화 암살에 , 밀양사람 김원봉(金元鳳)이오하는 장면이 나온다.

 

호가 약산(若山)인 그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일제강점기에 만주로 이주해 성장기를 보냈다.

 

1918년 금릉대학에 입학했고,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하여 의백(단장)에 선임되었다. 중국 황푸[黃浦] 군관학교를 졸업했다.


 

1930년대 후반 조선민족혁명당을 지도하면서 우리나라 민족주의운동의 한 축을 이루었고 '조선의용대'라는 강력한 군사조직을 결성하기도 했다.

 

19395월에는 김구와 전국연합전선협회를 결성했다.

 

알려지기로 일본 당국은 김구 선생보다 김원봉 선생을 더 두려워했고 확인하기는 힘들지만 현상금도 약산에게 더 비싸게 물렸다고 한다.

 

약산의 부인은 박차정(朴次貞)이다.

 

1910년 생인 그는 동래 일신여학교에 입학하여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30년 중국으로 망명한 후 의열단에 가입,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다 의열단장 김원봉과 결혼하였으며 19392월 장시성 쿤륜산 전투 중에 부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충칭에서 병사하였다.

 

해방 후 부인의 유해를 들고 귀국한 약산에게 닥친 운명

 

박차정의 묘는 지금 밀양에 있다.

 

남편인 약산은 해방된 해 12월에 귀국하며 부인의 유해를 고향 밀양에 묻었다.

 

해방된 조국의 고향에서 같이 영원하게 살자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러나 약산에게 친일경찰 노덕술이 찾아왔다.

 

국내 지지세력이 취약했던 이승만과 미 군정은 일제강점기 시대 일본에 붙어 행세하던 조선인들을 다시 양지로 불러냈고 특고를 지내며 특히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처참하게 대했던 노덕술도 경찰에 복귀했다.

 

일본에 대한 불순분자를 가두고 고문했던 노덕술은 이제 친미 반공의 구호를 들고 예전의 패악을 저질렀다.

 

사회주의 계열로 알려진 약산은 그의 표적이 됐고 중국에서 피를 흘려가며 찾은 해방 조국은 약산을 경찰서에 가두게 했다.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수모를 당한 약산은 고향 밀양에 내려와 며칠 울다 북한으로 넘어갔다고 전해진다.

 

부인 박차정과 영원히 살겠다는 그의 결심은 친일파들의 준동으로 무너졌다.

 

약산 김원봉을 독립운동가에 추서하자는 목소리에 질겁하는 노덕술의 후예들

 

지난 현충일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약산 김원봉을 언급했다.

 

그러자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 등 보수야당에서 난리가 났다.

 

그들이 문제를 삼는 지점은 월북 후 그해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고 9월에는 국가검열상에 올랐으며 19525월 북한 노동상을 맡았다는 것.

 

1950년 한국전쟁에서 그는 적의 편이었다는 점을 들어 진저리를 치는 중이다.

 

약산이 왜 월북을 해야 했는지는 따져 묻지 않는다.

 

그가 왜 해방된 조국에서 부인의 묘를 놔둔 채 고향을 등져야 했는지에 대해서도 외면한다.

 

다만 사회주의 계열이고 북한에서 벼슬을 했다는 점만 눈에 들어 올 뿐이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사회주의에 눈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1차대전 후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우리나라나 베트남 등 피점령국들은 환호했다.

 

이에 우리나라는 파리에 대표단을 보냈고 베트남의 국부 호찌민도  한국대표단들과 교류했음이 최근 밝혀지기도 했다.

 

그러나 윌슨의 주장은 승전국이 점령한 지역은 별개였다.

 

결국 그들의 권리를 강조한 것에 지나지 않았고 제국주의에 점령당한 지역의 신음소리는 이어졌다.

 

애초 미국과 일본은 가쓰라 데프트밀약을 통해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을 집어삼킨 바였다.

 

3.1운동 후 탄생한 상해 임시정부는 공화국을 선언했다.

 

종전 봉건왕조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으로 모든 인민이 동등한 대접을 받고 참여할 수 있는 공화국 건설을 확정했다.

 

그 당시 시대 상황을 보자.

 

중국도 봉건제도를 벗고 공화국으로 가자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고 짜르 시대를 극복한 러시아 혁명은 거의 완성단계에 있었다.

 

러시아 혁명을 이끈 레닌은 제국주의에 점령당한 약소국에 꾸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레닌과 자주 만났다는 사실도 입증됐다.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전체가 공화국으로 전진하고 있었으며 자본주의의 최종 단계로 여겨지는 제국주의와 대결을 벌이고 있던 참이다.

 

중국 대륙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선각자들이 사회 공화정에 관심이 깊을 수 밖에 없던 노릇이다.

 

오죽했으면 해방 후 귀국한 박정희 마저 사회주의를 대세로 여겨 남로당에 가입했다는 해석도 있다.

 

노덕술의 후예들은 절대 배경에 관심이 없다, 오직 색깔론만이 무기임으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따져보노라면 이데올로기는 시대의 흐름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데 절대적인 가치의 기준이 아니라는 점도 알게 된다.

 

약산 김원봉이 사회주의 성향이었다는 점은 그가 그만큼 조국의 미래를 고민했다는 반증이다.

 

또한 그가 월북이라는 선택지를 고른 것은 그만큼 우리의 역사가 배배꼬였다는 사실도 말해 준다.

 

이 모든 것을 싹 무시하고’ ‘빨갱이는 안 돼’, 더 나아가 빨갱이는 죽여도 돼등의 구호만 내세우는 세력은 노덕술의 후예로 불려도 마땅하다.

 

그들은 그때 그때 시대에 맞춰, ‘무엇이 정의인지. 무엇이 역사적 사실인지를 무시하면서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에 빌붙고, 해방 후에는 미국과 반공에 기생하며 꿋꿋하게 이 나라의 기득권임을 자처하고 있다.

 

최근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기생충이 떠오른다.

 

그들 왜곡된 기득권 세력은 한반도 5000년 역사의 기생충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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