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겹살이 먹고 싶다는 아이들의 주문이 부담스러워진 것도 처음이다.
먼저 외식을 떠올렸다.
저녁 6시가 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뜨거운 불볕더위에 ‘인근 식당을 찾아 걸어야 하고 거기에 가서도 불 옆에서 고기를 굽는다는 자체’가 영 싫었다.
이동할 때의 ‘짜증스러움’도 그렇지만 불판 앞에 앉았을 경우의 ‘대략 난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식당인지라 에어컨은 빵빵하게 켜 있을 것으로 예상해도 고기를 굽는 불이 내뿜는 열기는 고스란히 받아야 할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에 대한 대가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구이를 할 수 있는 장비 일속을 챙기고 바닷가로 가 볼까는 생각을 했다.
종전에는 레포츠 공원에서의 삼겹살 가족 회식도 괜찮았지만 이젠 불가능한 호사임을 알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는 탓에 금지됐고, 해수욕장 등을 찾아 불판을 피울라치면 인근 식당에서 날리는 눈총이 영 불편하다.
실제로 삼양해수욕장만 가더라도 방파제에서는 일체의 조리행위가 금지돼 있다.
가장 가능한 경우의 수는 집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는 일이다.
이마저도 집안의 경제권을 쥐고 있는 집사람의 눈치를 봐야 한다.
이 더위에 선풍기 바람에 의지해서 삼겹살을 굽는 일은 어지간한 인내심이 없으면 지레 포기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집사람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단 1시간만 에어컨을 켜자는 제안에 집사람은 정색하고 협상을 시작한다.
만약 전기세가 많이 나오면 ‘고통분담’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간의 공동부담을 결정지은 집사람이 에어컨 리모컨을 들 때부터 에어컨이 윙 소리를 내며 가동할 때까지의 시간.
마치 세르게이 M. 에이젠슈타인 감독이 영화 ‘전함 포텐킨’에서 처음 사용했다는 롱테이크(long take) 기법을 보는 느낌이 들 정도다.
1905년, 제정 러시아 시대. 전함 포템킨의 수병들은 장교들의 학대와 열약한 근무 조건에 불만을 가지게 된다.
썩은 고기를 식량으로 사용한 사실은 그들의 반란의 기폭제로 작용하고 결국 러시아 혁명으로 번지게 된다는 내용의 이 영화에서 오데사 계단의 학살 장면은 이 기법으로 사상 처음 촬영된다.
주인공의 주요 장면을 천천히 오랜 시간에 걸쳐 잡아내는, 홍콩 느와르 영화에서 자주 접할 수 있었던 이 촬영 기법을 집에서 볼 수 있다니.
더위와 비싼 전기료, 그리고 삼겹살을 향한 욕망이 빚어 낸 착시현상이리라.
정말, 주님이나 부처님의 은혜보다 더 자비로움을 느끼게 하는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맛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인터넷 기사를 검색했다.
새누리당 당 대표로 선출된 이정현 대표의 청와대 오찬 소식이었다.
사진을 보면 대통령은 겉옷을 걸쳤고 새누리당 참석자들도 넥타이는 매지 않았지만 양복 차림을 했다.
시원한 곳인 모양이다.
기사를 읽어보니 이 대표에 대한 박 대통령의 배려는 오찬 메뉴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바닷가재, 훈제연어, 캐비아 샐러드, 송로버섯, 샥스핀 찜, 한우 갈비 등 최고의 메뉴로 코스 요리를 준비하면서도 이 대표가 좋아하는 냉면을 특별히 대접했다.
청와대에서 외빈을 위한 식사 메뉴로는 보기 드문 냉면과 호남 음식 재료로 쓰이는 능성어 요리를 내놓은 것은 박 대통령의 각별한 관심이 담긴 것이라는 후문이다.
좋겠다.
더위 걱정 없이 전 세계에서 이름 높은 재료를 동원하는 미식을 할 수 있다니 말이다.
에어컨 바람과 삼겹살에 만족해야 하는 자신이 문득 초라해 진다.
간만에 포식을 해서인지 아이들은 해맑게 웃고 있다.
어느덧 집사람은 에어컨을 끄려는지 리모컨을 찾고 있다.
선풍기 날개만 더위에 지친 듯 윙윙 탄식을 내뱉으며 돌아 가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