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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로중 제일 작은 쇠백로가 돌위에서 쉬고 있다 ⓒ 지남준객원기자 |
흰옷을 언제부터 즐겨 입기 시작되었는지 자세히는 알 수는 없지만 중국 문헌인 ‘위지(魏志)’에 의하면 부여시대의 사람들이 이미 흰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흰옷을 애용하게 된 것은 태양숭배의 원시적 신앙에 의해 그 광명의 상징인 흰 빛을 숭상했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 민족이 백의민족임을 특별히 강조된 것은 일제강점기로서 그것은 우리를 지배하고 억압하던 일본인의 옷이 무색옷이기 때문에 그와는 대조적인 백의를 항일정신의 상징으로 더욱 강조됐다.
그러나 흰 옷의 착용이 경제적인 면에서는 반드시 바람직한 의복제도가 아니기 때문에 1894년(고종31)의 갑오개혁 이후부터는 색상이 있는 의복의 착용이 장려됐으며, 1906년(고종 광무 10)에는 법령으로 흰 옷의 착용을 금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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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로가 무리지어 바닷가에서 먹이를 찾고 있다 ⓒ 지남준객원기자 |
그러나 8·15광복 이후부터는 관청에서 백의착용을 금지하지 않았으나 자연스럽게 색의를 많이 입게 됐다.
우리민족은 흰색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있다.
광명의 흰 빛을 숭상하며 불사불멸의 능력을 향유하고픈 염원을 항상 마음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흰색의 동물들까지도 아주 귀한 대접을 받게 됐는데 간혹 메스컴에 흰사슴이 태어나서 나라에, 아니면 그 지방에 좋은 징조라고도하여 반긴다.
뱀을 싫어하기도 하지만 흰색의 뱀이 발견되면 백사라 해 귀하게 여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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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백로가 먹이를 잡느라 물속에 머리가 완전히 잠겨있다 ⓒ 지남준객원기자 |
가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마라
것치 거믄들 속조차 거믈소야
아마도 겉 희고 속 검을슨 너뿐인가 하노라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직(李稷)의 작품이다.
이 시조는 고려 유신(遺臣)으로서 조선의 개국 공신이 된 작자가 자신의 처세를 변호한 노래이다.
이 시조에서는 구차하게 연명하면서 남을 비방하는 무리를 비유적으로 힐책하고 있으며, 작자 자신의 결백을 변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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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에서 드렁어리(선어)를 잡아먹고 있다 ⓒ 지남준객원기자 |
가마귀 디디는 곧애 백로야 가지마라
희고 흰 긷헤 검은 때 무칠셰라
진실로 검은 때 무티면 씨을 길히 업사리라
-선우당 이씨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들이 너의 흰빛을 시샘하나니
맑은 물에 깨끗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이약녀 (정몽주 어머니)
포은 정몽주가 이성계의 병 소식을 들은 후 문안을 드리려 가려고 하자 간밤의 꿈이 흉하니 가지 말라고 말리면서 이를 불렀다 한다.
정몽주는 결국 끝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 유명한 살생부의 이방원이 보낸 자객 조영규에게 피살되었고 그곳이 바로 지금의 선죽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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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이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고 있다 ⓒ 지남준객원기자 |
그 새가 바로 백로이다.
백로를 예전에는 해오라기라고도 했다지만 지금의 해오라기는 하얀색이 아니라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는 새이다.
하야로비, 해오라비, 해오리 등으로 말하는 희다의 뜻에서 명칭이 있었으나 지금은 다른 종의 새를 일컫는 명칭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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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지어 이동하고 있는 백로들 ⓒ 지남준객원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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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로의 모습 ⓒ 지남준객원기자 |
황로는 여름철새로 겨울이면 볼수가 없다.
노랑부리백로는 천연기념물 361호로 지정돼 멸종위기종으로 이동시기에 간혹 제주에서 볼수 있기도 하다.
대부분의 백로는 봄이면 찾아와 여름에 번식을 하고 가을이면 대만, 필리핀등지로 내려가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다시 찾아온다.
우리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백로는 제주 해안가와 물이 있는 저수지, 웅덩이 가릴것 없이 어디서든지 활동 한다.
몸 전체가 흰색이라는 이유로 우리 민족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아온 아주 행복한 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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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새인 황로가 나무위에 앉아 깃털을 다듬고 있는 모습 ⓒ 지남준객원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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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부리백로(쇠백로와 달리 머리뒤 장식깃이 많이 있다) ⓒ 지남준객원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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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위에 앉아 쉬고있는 쇠백로 ⓒ 지남준객원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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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짓하며 날아오르는 백로 ⓒ 지남준 객원기자 |